'휴전회담'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13.12.16 휴전협상의 배경 (7)
  2. 2010.11.05 97. 멈추어진 전쟁 (140)
  3. 2010.11.04 96. 중공군의 마지막 공세 (99)

휴전협상의 배경

 

6·25전쟁에서 휴전협상은 전쟁발발 후 1년이 지난 1951 6월을 전후하여 제기되었으며, 그 후 7 10일 쌍방 협상대표들은 개성에서 만나 최초 회담을 개최하였다.’

 

 



1951 7 10, 휴전회담을 위해 개성으로 출발하기 전 헬리콥터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한 유엔 측 대표들, 왼쪽부터 버크 제독, 크레이지 공군 소장, 백선엽 소장, 조이 수석대표(해군 중장)와 대표들을 전송하기 위해 나온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대장, 호디스 육군 소장.

 

쌍방의 휴전협상 제의 과정

6·25전쟁은 북한의 김일성 공산정권이 소련과 중공의 지원하에 전 한반도를 공산화한다는 목표로 1950 6 25일 남침을 자행함으로써 발발하였다.

 

이에 한국을 지원하여 자유진영의 유엔군이 참전하고, 뒤따라 공산진영의 중공과 소련(공군)이 북한을 지원하여 직접 개입하였다. 따라서 이 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전쟁으로부터 국제적 성격의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한편 양측은 군사적으로 격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전쟁이 세계전쟁으로 비화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북한의 남침 직후에는 주로 유엔의 주도 아래 평화의 회복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유엔은 한반도 문제를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선에서 전쟁을 중단시키려 여러 차례 시도하였지만 공산군의 반대로 유엔의 제안은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다.

 

먼저, 1950 6 25북한이 남침을 자행하자 유엔은 결의를 통해 북한이 침략을 중지하고 즉각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후 중공군이 개입한 1950 12월에는 유엔총회가‘정전 3인위원회’를 설치하여 중공에 대해 38도선 이남으로 침공하지 않도록 요구하는 등 한반도에서 평화를 회복하려 노력하였다.

 

 

 


정전위원회는 평회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반면 공산군은 195010월 초 북한군이 유엔군의 반격에 의해 패주할 때 38도선에서 휴전을 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 제의는 ‘외국군 즉각 철수’등의 불합리한 조건을 달고 있어 유엔군 측이 수용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공산군의 제의는 유엔군의 38도선 돌파를 지연시키며 이미 출병을 결정한 중공군의 참전 준비에 시간을 벌고자 하는 위장 평화제의였기 때문에 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의 파병결정에 따라 참전준비를 마친 중공군.

 

해가 바뀌어 1951년 초에 접어들어서도 유엔의 평화회복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3월 하순 유엔군이 38도선을 회복할 무렵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직접 공산군사령관 펑더화이에게 휴전회담을 제의하였으나 이 제의 역시 묵살되었다. 이는 상대방이 그때마다 힘으로 전쟁목표를 달성하려는 정책을 계속 추구 한데 기인하였다.

 

전선 교착과 휴전협상

쌍방은 1951 45, 이른바 중공군의 춘계공세에서 개전 이후 최대의 결전을 치렀다. 여기에서 피아 모두 최악의 인명손실을 입은 후에야 무력으로 승리를 쟁취하려는 정책을 포기하고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데 양측 모두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되었다.

 

이 무렵 미국이 주도한 미·소의 막후 접촉에서 소련이“전쟁 전 현상에서 휴전으로 평화를 회복한다”는 데 호응해 옴으로써 마침내 휴전협상의 장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휴전을 제의하고 있는 유엔 주재 소련대표 말리크의 1951 6 23일 유엔 라디오 장면.

 

그러나 협상이 성사되기까지 힘에 의한 타결 시도가 몇 차례 더 반복되었고, 그 중에는 ‘국지적 제한 전쟁이냐 또는 확전이냐’라는 기로에까지 이른 경우도 있었다. 이 시기에 남북한은 총력전을 펼쳤고, 동서 양 진영도 동원할 수 있는 최대 역량을 투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산군 측은 한반도의 공산화를, 유엔군 측은 침략자를 응징하고 자유를 수호하며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피를 흘렸다.

 

유엔군의 반격작전이 끝난 1951 6, 전선은 또다시 38도선 부근으로 회귀하였고 그 후 교착 상황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무렵 중공군은 춘계공세에서의 실패와 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재기불능의 손실을 입어 더 이상의 공세가 거의 불가한 상황이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도 치열한 공방전은 계속되었다.

 

1년간의 전쟁을 통해 공산군 측은 그들의 힘으로 전 한반도를 통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엔군 측으로서도 힘에 의한 응징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전쟁을 사실상 주도한 소련과 미국은 각각 한반도에서의 전략적 이익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대의 의도를 확인하였고, 이로써 이 지역에서 냉전구조의 균형을 파괴할 수 없다는 현실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공동의 인식하에 쌍방은 기존 정책과는 달리 전쟁을 협상을 통해 해결하기 위해 교착된 전선에서 휴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엔군 측에서는 유엔의 역할을 대행하고 있는 미국이 전쟁 이전 상황에서의 휴전정책을 확정한 데 이어 공산국 측에서도 소련이 중심이 되어 1951 6 13일 모스크바 조·중·소 회담에서38도선의 경계선을 복구하는 조건에서 휴전이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양측의 협상목표와 전력증강

양측의 협상 목적과 목표는 각기 달랐다. 유엔군 측은 군사협상을 통해 일단 휴전한 다음 유엔기구를 통해 정치적 수단에 의한 통일 민주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1951 7 8일 휴전회담을 위한 예비접촉을 벌인 개성의 광문동 민가.

 

 

 

예비접촉 당시의 모습.

 

 

 

휴전 예비 회담시 북한군과 중공군.

 


 

반면 공산군도 전선이 교착된 6월부터 방어태세를 취하면서 지상군의 정비와 공군력의 전개를 통해 전력을 회복한 다음 8월 이후에 공세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고, 이 기간 중에 휴전회담을 추진한 것은 그러한 여건을 마련하기에 상당히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1951 7 10일 지프에 백기를 달고 회담장에 들어서는 유엔군 측 대표단. 백기를 다는 것이 합의사항이었지만 공산군 측의 유엔군 측을 항복사절로 선전했다.

 

 

 

1951 7 8일 첫 접촉에 나선 유엔군 측 대표단.

왼쪽은 이수영 중령, 오른쪽은 키니 대령.

 

 

 


휴전회담 첫 날의 모습.

  



이때 병력 면에서는 공산군이 2:1로 우세하였지만 화력이나 해·공군 전력 면에서는 유엔군이 단연 압도적이었다. 이처럼 1년 동안의 격전 끝에 대치한 양측은 휴전에 대비해 방어선을 강화하고 부대의 재편성·재배치를 통해 전력을 재정비하면서 휴전회담의 진전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comment hacker un compte facebook 2013.12.22 05: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하였지만 화력이나 해·공군 전력 면에서는 세하였지만 화력이나 해·공군 전력 면에서는

  2. cheat black ops 2 ps3 2013.12.22 2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 휴전회담 대표에게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였다.에게 정보를 에게 정보를 에게 정보를

  3. paysafe card generator 2013.12.22 20: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면에서는 세하였지만 화력이나 해·공 면에서는 세하였지만 화력이나 해·공

  4. http://arpms.com 2013.12.23 03: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를 제공하기도 하였다.에게 정보를보를 제공하기도 하였다.에게 정보를보를 제공하기도 하였다.에게 정보를

  5. how to improve credit score 2013.12.23 04: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많은 우리의 인원을 야만적으로 학살한 유수많은 우리의 인원을 야만적으로 학살한 유

  6. how to improve credit score 2013.12.23 04: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많은 우리의 인원을 야만적으로 학살한 유수많은 우리의 인원을 야만적으로 학살한 유

  7. myhellotoyou 2013.12.23 06: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로들을 조직화하고, 공산군 휴전회담 대로들을 조직화하고, 공산군 휴전회담 대로들을 조직화하고, 공산군 휴전회담 대

97. 멈추어진 전쟁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11.05 08:13

  휴전이 목전에 다가왔을 때 가장 커다란 문제는 전쟁의 제1당사자인 한국정부가 휴전을 반대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마이동풍 같은 공산군 측과 2년간 밀고 당기며 어렵게 협상을 마무리 짖게 되었지만 막상 같은 배에 타고 있던 한국이 휴전을 결사적으로 반대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정부는 반대를 넘어 오히려 국군 단독으로 북진을 하겠다고 호헌하였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도발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많은 희생을 보았음에도 막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불완전한 분단이 계속 이어지는 휴전을 용납할 수 없다는 우리 정부의 태도는 대의명분상으로 타당하였습니다.


[한국정부는 표면적으로 휴전을 반대하였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군 단독으로 전쟁을 계속 할 수 없음은 한국정부가 오히려 잘 알고 있었고 더불어 휴전을 막을 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없었습니다. 사실 표면적으로 결사반대를 외친 이면에는 다른 뜻이 숨어 있었습니다. 바로 전쟁재발 방지와 관련한 문제였습니다. 1953년 7월 초순까지도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에는 이에 대해 심각한 이견(異見)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1949년 미군 철군 후 곧바로 북한의 침략을 받아 패망의 위기에 까지 몰렸던 한국 정부의 뼈아픈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더불어 휴전 후 미군과 중공군이 한반도에서 동시에 철군한다 하더라도 중공군은 압록강만 건너면 언제든지 북한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도 그런 우려를 충족시켰습니다.


  결국 미국이 특사를 파견하여 상호방위조약처럼 전후 안전보장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표명해 주고 더불어 대부분의 현안이 합의되자 이승만 대통령도 휴전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나름대로 실리를 취하면서도 명분상으로 마지못해 이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겉으로 보여준 우리정부의 단호한 모습이 공산군측을 상당히 불안하게 만들었고 특히 휴전 조인직전에 보여준 반공포로 석방은 그런 의구심을 증폭시켰습니다. 따라서 판문점에서 재개된 휴전회담에서 공산군측은 유엔군측에‘한국정부로 하여금 정전협정을 이행하도록 하는 대책’을 집중적으로 요구하였을 정도였습니다.


  2000년대 들어 북한측이 이슈화하고 있는 서해의 NLL(Northern Limit Line 북방한계선)은 막상 군사분계선 설정 시 해군력이 압도적이었던 유엔군이 스스로 이 이상 북으로 올라가 군사작전을 벌이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오히려 공산군측을 안심시켰던 한계선이었습니다. 그 만큼 유엔군은 휴전성립을 위해 한국 정부를 안심시킴과 동시에 공산군측을 달랬습니다. 결론적으로 본다면 공산군측을 불안하게 만들고 미국으로부터 차후 안전보장 책을 얻어낸 한국정부의 당시 행태는 전략적으로 커다란 성과를 거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휴전협정서에 서명하는 해리슨과 남일]


  이처럼 공산군측은 내면적으로 미국보다 휴전에 더욱 매달리던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동족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며 비극적인 전쟁을 벌인 대가로 얻게 된 소득이라는 것은 어느덧 감내하기 힘든 선까지 다 달은 엄청난 피해였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전선에서 실질적인 군사행동은 거의 중단되었고 포로의 인도 장소와 정전협정의 조인 장소 문제만 남아있었습니다. 우여곡절을 거듭한 양측은 7월 24일로 예정되었던 정전협정의 조인 일자를 7월 27일로 조정하여 당일 22시를 기해 전면 발효시키기로 합의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10시 양측을 대표한 유엔군측의 해리슨 장군과 공산군측의 남일은 조인 장소에 착석했습니다. 그리고 인사도 교환하지 않은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준비된 협정서에 10시 12분 조인을 마치자마자 해리슨은 헬기를 타고 문산리로 향했으며, 남일 또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프차를 타고 회담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10시까지 상대 진지를 향한 마지막 포격과 폭격은 계속 되었습니다. 특히 유엔군의 전폭기들은 북한의 전투력을 조금이라도 더 감소시킬 목적으로 북한의 비행장, 철로 등을 강타하였으며 해상에서 해군의 군함들이 함포사격을 실시했습니다. 그 만큼 상대가 너무나 미웠던 것이었습니다.


[휴전직후 비무장지대 설정 전 군사분계선에서 대치 모습 ]


  그리고 정각 22시가 되자 한반도 전역에서는 포성이 멎었고 마침내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되었던 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종전이 아닌 말 그대로 휴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전쟁의 끝이 아닌 엄연히 전쟁 중의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만일 어느 일방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면 곧바로 확전이 될 수 있는 불안전하고 어정쩡한 미완의 평화였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전 댓글 더보기
  2. flexpet coupon 2013.05.12 17: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적으로 반대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정부는 반대를 넘어 오히려 국군 단독으로

  3. ibcbet 2013.05.14 19: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 내에서 사실의 수준은 실질적으로 주제에 대한 전자책을 쓴 것처럼 화려입니다. 블로그 사이트가 더 중요 이유를보고 싶어 할 사람이 최적입니다.

  4. Autokredit 2013.05.15 15: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군 단독으로 북진을 하겠다고 호헌하였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도발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많은 희

  5. sora training 2013.05.22 16: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별 공급 사랑하라는하기 전에 귀하의 사이트를 떠날 수 있을까? 새 게시물을 검사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다시있

  6. xls medical uk 2013.05.23 05: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 있을까? 새 게시물을 검 수 있을까? 새 게시물을 검xls medical uk

  7. sample sympathy messages 2013.06.10 16: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정부는 반대를 넘어 오히려 국군 단독으로 북진을 하

  8. sewer camera inspection nj 2013.06.17 16: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았음에도 막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불완전한 분단이 계속 이어지는 휴전을 용납할 수 없다는 우리

  9. nj plumber 2013.07.01 16: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반대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정부는 반대를 넘어 오히려 국군 단

  10. nj carpet cleaning 2013.07.22 15: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는 전쟁의 제1당사자인 한국정부가 휴전을 반대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마이동풍 같은 공산군 측

  11. cartoon network arabic 2013.08.15 14: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들의 아름다운 추억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시절의 아픈 기억들은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12. professional voice over services 2013.09.14 01: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변경내용을 안내하고 있었지만, 개별적으로 변경정보가 전달되지는 않았습니다.

  13. Duvetica Jackets 2013.09.16 1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변경내용을 안내하고 있었지만, 개별적으로 변경정보가 전달되지는 않았습니다.

  14. Belleville usaf zipper boots 2013.10.01 20: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변경내용을 안내하고 있었지만, 개별적으로 변경정보가 전달되지는 않았습니다.

  15. super mario bros 2013.11.17 08: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업장을 만드는 것은 흥미로운 기록 숭배하는 사람들을 다할 것입니다. 그들은 브랜드를 완전히 혁신에 관한 글을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시간 복사 프리랜서 인터넷 프리랜서는 자신의 지식을 논의 기간입니다.

  16. Code de reduction Robot piscine 2014.02.14 04: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환상적인 새로운 웹 사이트와, 고마워요. 나는 매우 다른 사람에게 보여 불 붙었어요. 그건 날 정말 귀하의 광대 한 이해를 만족 지혜가 세상으로 시도를위한 새로운 채널이 있습니다.

  17. Relationship with Commodity Warrants 2014.02.17 19: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숭배하는 사람들을 다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트와, 고마워요. 나는 매우 다른 사람에게 보여 브랜

  18. baju online shop 2014.02.21 20: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환상적인 새로운 웹 사이트와, 고마워요. 나는 매우 다른 사람에게 보여 불 붙었어요. 그건 날 정말 귀하의 광대 한 이해를 만족 지혜가 세상으로 시도를위한 새로운 채널이 있습니다.

  19. assurance voiture sans permis 2014.02.22 2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업장을 만드는 것은 흥미로운 기록 숭배하는 사람들을 다할 것입니다. 그들은 브랜드를 완전히 혁신에 관한 글을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시간 복사 프리랜서 인터넷 프리랜서는 자신의 지식을 논의 기간입니다.

  20. 피알앤애드 2014.06.25 17: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25포스팅 관련하여 사진자료가 필요해서 퍼다 씁니다.
    물론 출처를 밝히고, 상업적인 용도나 변경은 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96. 중공군의 마지막 공세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11.04 08:17


  언제부터인가 휴전회담이 재개될 때면 묵시적인 관행에 따라 전선은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빠져들고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포로송환 문제 때문에 예상보다 휴전회담이 장기화되자 1952년 이후로 전선은 피아모두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거쳐 확보한 방어선을 공고히 하는 형태로 서서히 변해갔습니다. 결국 언제인지는 전쟁의 종결은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흐름으로 인식되었고 다만 전쟁이 멈추었을 때 상대보다 내가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방향으로 군사전략이 모색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중공군은 대미를 장식할 대공세를 준비하였습니다.]


  특히 회담지연 전술을 적절히 활용한 공산군측은 이 시기에 전력을 대폭적으로 증강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1953년 봄이 되었을 때 공산군은 중공군 135만 명, 북한군 45만 명 등 총 180만 명의 대병력과 각종 장비를 전선에 배치시켰는데, 이것은 6·25전쟁 발발 이래 최대의 병력 수준이었습니다. 결심만 한다면 지난 1951년 초여름의 제6차 공세이후 전략적으로 포기하고 있던 대규모의 공세를 재개할 수 있는 단계까지 도달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반면 종전에만 급급하였던 유엔군으로서는 이에 맞선 전력증강이 없었습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는 제8군사령관 밴 플리트 대장이 건의한‘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편 계획’의 조속한 추진에 나섰는데, 이것 또한 엄밀히 말해 국군이 북한의 도발을 스스로 억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전력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휴전을 염두에 둔 조치의 일환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1953년 5월 1일에는 현리전투로 해체되었던 제3군단이 재창설되었고, 6월 18일까지 제26, 27사단이 신편 됨으로써, 국군은 휴전발효 직전에 총 3개 군단 18개 사단의 전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즈음이던 6월 8일, 포로송환협상이 타결되면서 휴전이 현실화 되자 공산군측은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다”고 선전하고 한국정부의 북진주장과 휴전반대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유엔군의 반격을 유발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한적인 공세를 감행하고자 했습니다. 중공군 참전이후 계속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국군이 전담하고 있는 전선을 노렸고 이때 공세지점으로 결정된 곳이 국군 제2군단이 담당하던 화천북방의 금성돌출부지역이었습니다. 이곳은 국군 담당지역 중에서 지형이 특히 험하여 기갑 및 화력지원이 취약하다고 판단된 곳이었습니다.


[금성돌출부에서 중공군의 제7차 공세가 개시되었습니다.]


  1953년 6월 10일 밤, 1개 군의 중공군이 국군 제5, 8사단 일대를 집중 공격하였으나 어느덧 산전수전 다 겪은 국군의 효과적인 지연에 막혀 9일간 13킬로미터 정면에서 4킬로미터를 남진하는데 그쳤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면 유엔군도 현 전선을 그냥 인정 할 것이라 판단한 공산군측은 작전이 성공한 것이라 만족해하며 6월 18일 전후로 예상 되는 휴전협정의 조인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변수가 생겼습니다. 6월 18일 자정에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27,000여명의 반공포로가 석방되면서 조인 직전에 있던 휴전회담은 중단된 것이었습니다.


  선전효과를 노렸던 공산군측의 의도는 일거에 좌절되었고 상황은 급속히 냉각되었지만 공산군측은 휴전회담 자체를 깨려하지 않았습니다. 작전 자체가 휴전을 염두에 두었을 만큼 공산군측고 휴전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자존심 문제라 생각한 중공군은 지난 51년 5월, 제6차 공세에서 뼈아픈 패배를 당한 화천저수지의 재점령을 목표로 대규모 공세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중공군의 대병력이 이 일대로 집결되면서 긴장이 높아지자 클라크는 휴전을 염두에 두고 일본으로 빼놓았던 미 제24사단과 제187공수연대를 한국으로 황급히 재배치했습니다.


  7월 13일 밤, 지난 6월의 제한적인 공세와는 비교가 안 되는 5개 군의 대병력이 국군 제2군단의 금성 돌출부지역을 강타하면서 6·25전사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중공군의 제7차 대공세가 게시되었습니다. 중공군은 압도적인 병력을 이용하여 금성을 양익포위 하여 전면에 배치된 국군 제6사단과 제8사단을 일거에 섬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테일러(Maxwell D. Taylor) 제8군사령관은 포위를 거부하고자 방어선을 금성천 남단으로 조정하여 아군의 철수를 명령했습니다. 이에 따라 국군 제2군단과 미 제9군단이 적근산과 백암산을 연하는 선으로 후퇴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7월 16일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시켰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래왔듯이 중공군의 공세 여력이 바닥이 나자 아군은 반격으로 전환하여 7월 19일에 다시 금성천과 북한강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중공군은 마지막 공세로 전선을 남하시켰으나 엄청난 피해를 겪었습니다. ]


  중공군이 패주하자 국군은 금성천 북방으로 재진출하려 하였으나 휴전을 염두에 둔 유엔군사령부의 제지로 마지막 혈전은 거기서 끝나게 되었습니다. 국군 제2군단은 중공군의 마지막 공세에서 피탈당한 지역의 절반정도만을 회복하게 되어 아쉬움을 남겼지만 중공군은 전쟁 막바지에 무려 6만 명 정도의 사상자를 내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6·25전쟁의 마지막 혈전이자 국군의 마지막 전과로 전사에 기록되었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생생! 6·25 > 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98. 전쟁이 남긴 것  (154) 2010.11.08
97. 멈추어진 전쟁  (140) 2010.11.05
96. 중공군의 마지막 공세  (99) 2010.11.04
95. 휴전반대로 얻고자 한 것  (105) 2010.11.01
94. 해방구가 되어버린 포로수용소  (224) 2010.10.28
93. 전혀 새로운 난제  (227) 2010.10.27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전 댓글 더보기
  2. prepare-for-test.com 2013.08.22 04: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해 끙끙 머리를 감싸 메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왜 이리도 미련이 남는지, 아직까지 접수는 하지 못하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뭔가 부족한 듯 한데, 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위해 족집게 특강의 서류전형 마무리 특집!

  3. weight loss holy grail review 2013.08.24 23: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

  4. book of ra deluxe 2013.08.28 03: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私はそれがいくつかの退屈な古い記事になるだろうと思ったが、それは本当に私の時間を補償する。私は私のブログでこのページへのリンクを掲載する予定です。私は確信している私の訪問者は、それが非常に有用で探します

  5. Airport Car Parking 2013.09.02 00: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쳐 지나갑니다. 왜 이리도 미련이 스쳐 지나갑니다. 왜 이리도 미련이 스쳐 지나갑니다. 왜 이리도 미련이

  6. uktutor.org 2013.09.02 15: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는지, 아직까지 접수는 하지 못하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뭔가 부족한 듯 한데, 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위해 족집게 특강의 서류전형 마무리 특집!

  7. sms lån med betalningsanmärknin 2013.09.04 05: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따라 전선은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빠져들고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포로송환 문제 때문에 예상보다 휴

  8. personal trainer toronto 2013.09.05 00: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 빠져들고는 하였에 빠져들고는 하였에 빠져들고는 하였

  9. Duo Residencesaxn--lnapengarmedbetalningsanmrkningochutanskerhet 2013.09.07 23: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 빠져들고는 하였에 빠에 빠져들고는 하였에 빠에 빠져들고는 하였에 빠

  10. http://employeemonitoringapp.com/2013/08/28/utilizing-the-employ 2013.09.08 0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Good thing, the worker chase software package may also be used for work-related functions. Through this program, you'll be completely eased that the business or company that you simply have established consists by individuals whom you'll be able to trust.이리도 미련이 남는지, 아직까지 접수는 하지 못하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11. looking for a Florida home 2013.09.16 0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없는 역사의 흐름으로 인식되었고 다만 전쟁이 멈추었을 때 상대보다 내가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방향으로 군사전략이 모색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12. online roulette 2013.09.25 20: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Wonderful! Actually wealthy content and extremely helpful in sequence. I got it my answer from over here. I extremely advocate his/her mechanism with the helpful educational information. Thanks a lot………..

  13. thesis writing 2013.09.30 23: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기소개서에서 중요하지 않은 부분은 없겠죠. 모든 항목에 자신이 왜 적합한 인재인지, 어떤 포부를 가지고 있는지를 항상 보여줄 수 있도록 작성이 필요합니다. 위의 항목을 통해 의외의 부분에서 여러분의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해보세요~

  14. Condo living in Bal Harbour 2013.10.24 19: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통해 의외의 부분에서 여러분의 매력을 발산할 수 통해 의외의 부분에서 여러분의 매력을 발산할 수

  15. car leasing 2013.10.24 20: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방향으로 군사전략이 모색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16. research interest statement 2013.10.24 22: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왜 이리도 미련이 남는지, 아직까지 접수는 하지 못하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뭔가 부족한 듯 한데, 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위해 족집게 특강의 서류전형 마무리 특집!

  17. http://essay-writing-service-australia.com/ 2013.10.26 10: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Oh! Amazing and really rich content and very useful information. I got it my solution from over here. I highly recommend his/her workings with the useful informative information. Thanks a lot………..

  18. http://essay-writing-boss 2013.10.27 21: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Oh! Amazing job with the article. I come across few helps over here related by this post to do my task nicely. I highly recommend this. Thanks a lot………

  19. http://write-my-essay-4-me 2013.10.27 2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Oh! Amazing vocation with the piece. I hit upon few helps over here related by this post to act my task nicely. I highly recommend this. Thanks a lot………

  20. data entry speed test 2013.11.06 17: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천으로 널리 메뚜기를 아이들은 꽤 많이 잡기도 했습니다. 다음 편에선 요 초딩 아이들이 메뚜기를 잡은 이야기도 좀 들려

  21. car leasing 2013.11.18 17: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후로 전선은 피아모두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거쳐 확보한 방어선을 공고히 하는 형태로 서서히 변해갔습